답동성당
인천의 시간 위에 세워진 믿음의 자리
1889년 제물포에서 시작된 작은 신앙 공동체는 오늘날 천주교 인천교구의 중심인 주교좌 답동 성 바오로 성당이 되었습니다.
1889 제물포에서 시작된 첫걸음
개항 이후 제물포는 서울로 향하는 관문이자 새로운 문화가 모이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1889년 7월 1일, 니콜라 빌렘 신부가 인천 지역 최초의 본당인 제물포성당을 설립합니다. 오늘날 답동성당으로 이어지는 인천 가톨릭 신앙의 첫 장이 열린 순간입니다.
1890 답동 언덕에 마련한 신앙의 터전
빌렘 신부는 지금의 답동성당이 자리한 답동 언덕의 대지를 매입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성전도, 종탑도 없었지만 이 언덕은 훗날 인천교구의 중심이 될 믿음의 터전으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1893-1897 멈춤을 넘어 세워진 성전
성전 건립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마라발 신부가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지만, 1894년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공사는 다시 이어졌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첫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1900 도시의 하루를 알린 세 개의 종
성당 종탑에는 세 개의 종이 봉헌되었습니다. 종은 매일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에 울리며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답동성당의 종소리는 그렇게 제물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1935-1937 더 많은 사람을 품은 오늘의 성전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기존 성전은 공동체를 모두 품기 어려워졌습니다. 드뇌 신부는 성전 증축을 추진했고, 1935년 시작된 공사는 1937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때 완성된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답동성당의 기본 형태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사라질 뻔한 종을 지켜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무기 제작을 위해 금속 물품을 강제로 거두어 갔습니다. 답동성당의 종도 공출될 위기에 놓였지만, 임종국 바오로 신부의 기지로 종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인천 곳곳으로 옮겨졌던 종들은 광복 후 다시 답동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1950 전쟁 속에서도 남은 성전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답동성당은 일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큰 훼손 없이 모습을 지켰고, 높은 답동 언덕 위의 종탑은 인천 원도심을 바라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61 인천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되다
1961년 천주교 인천교구가 설정되면서 답동성당은 인천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제물포의 작은 본당으로 출발한 성당이 인천교구의 중심이 된 순간입니다.
1970년대 시대의 아픔과 함께한 성당
답동성당과 인근 가톨릭회관은 인천 지역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성전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정의를 이야기하는 장소로서 지역사회와 함께 했습니다.
1981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다
답동성당은 인천의 초기 가톨릭 역사를 보여주는 성전이자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징을 간직한 문화유산입니다. 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2023 성당 앞마당이 시민의 품으로
오랜 정비사업을 거쳐 성당 앞마당에는 잔디공원과 계단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14처와 민주화운동 기념비가 자리하고, 인천항과 월미산 너머로 지는 석양도 한층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답동성당은 이제 기도와 역사, 휴식이 함께하는 열린 공간으로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과거를 품고 미래로 나아가다
답동성당은 인천 최초의 본당에서 출발해 수많은 본당과 공동체가 성장하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곳에는 미사가 봉헌되고, 오랜 성전과 종소리 안에서 새로운 신앙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1889년에 시작된 믿음의 여정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답동성당 성전과 부속 건물














답동성당 주요 인물 및 미사와 행사









답동성당을 지켜온 신자들








사진과 내용 출처 : 인천교회사연구소, 천주교인천교구역사박물관, 답동성당 100년사 사진 자료
